80년 당시 고3학생 김행엽씨의 5·18

상무대 감금 90일은 야만적 폭력의 일상

최창호 대표기자 | 입력 : 2021/05/20 [20:56]

 

                             ▲ 김행엽씨

 

1980년 5월 22일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함평에서 광주로 향합니다. 치안과 안정을 도모하려 했던 함평공원에서의 집회는 이들을 붙들어두질 못했습니다.
광주 시민들과 함께 싸우겠다고 나선 의로운 25여명의 함평 사람들!
이 가운데 당시 시민군으로 나선 고교 3학년생 김행엽씨를 2021년 5월 17일 만났습니다.

 

Q. 당시 고등학생이 시민군으로 참가했다는 얘기는 광주지역에서만 있었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 우리 함평에서도 학생시민군이 있었네요.
A. 네, 저를 포함해 7명이 참가했습니다. 그 때 당시 다 농고 3학년 친구들입니다.


Q. 그러시군요. 학생 시민군! 어떻게 동참하게 되셨는지요?
A. 5월 21일로 기억합니다. 머리를 다쳤는지 붕대를 감았습디다. 피를 흘린 자국이 보이구요.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제대로 걷지도 못했어요.
함평 읍내에 광주 대학생이 방송을 하는데 짠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읍내 사람들이 먹을 것도 올려주고 물도 주고 그랬지요.
그리고 그 다음 날 함평공원에서 집회를 한다고 해서 함평공원으로 올라갔습니다.


Q. 22일날 공원에서 집회는 어떠 했나요?
A. 별 말이 없었어요. 기억나는 건 만세삼창 한 거예요. 만세도 그냥 만세! 만세!만세였어요. 행사도 길지가 않았습니다.(이때 동석한 유광범님이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치안 유지'라는 말을 주로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Q. 공원에서 집회가 끝나고 어떠했습니까?
A. 함평터미널에 전날 시민군이 놓고간 삼양시내 버스가 있었어요. 바퀴도 터지고 유리창도 깨진 상태였습니다. 그걸 고쳤어요. 형들과 차를 탔지요. 광주로 가자고 했습니다.
지프차 한 대가 제일 앞장 서고 우리는 삼양시내버스를 타고 출발했어요.
인원은 25명 정도였습니다. 남평 활주로 있는 데까지 가니까 각 시ㆍ군에서 온 차들이
매직으로 ○○군, □□군 이라고 차에다 쓰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나주 남평 마을 사람들이 먼저 간 버스에 사람들이 총 맞아 죽었으니 못가게 했습니다. 모여있다가 우리는 차를 돌렸습니다.


Q. 차를 돌려 어디로 향했습니까?
A. 해남까지 갔습니다. 해남 군부대에 가서 무기를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해남 근처에 가니까 헬기가 뜨고 포 설치를 해뒀드라고요. 군대대장이 해남경찰서 무기고에 가면 총기가 있다면서 거기 무기를 가져가라 그래서 무기고를 부수고 총기를 꺼내 무장을 했습니다.
나주 근처에 가니 낙하산 타고 공수부대가 쫙 깔렸다고 동원예비군들이 전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차 라이트까지 끄고 모든 차량이 조용히 차를 돌려 빠져나갔습니다.
이 때 함평으로 가자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안 된다. 총을 든 우리가 이 밤에 들어가면 난리난다."
"좁은 함평 바닥에 야밤에 총격전이 벌어지면 많은 군민들이 죽게 된다."
그래서 목포쪽으로 내려가기로 하고 무안터미널에 정차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함평으로 돌아가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우리는 학다리 사거리를 거쳐 함평으로 들어왔습니다.
경찰서로 안 가고 군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무기 반납을 했습니다.


Q. 그 이후 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A. 무기를 반납하고 한참 지난 어느 날,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학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드라구요. 경찰서에 가니까

"느그 고생했다. 간단하게 조서 좀 꾸릴게"
그러드라구요. 조서 다 꾸미더니
"가서 공부해라."

그래서 돌아왔지요. 그리고 한 3일 지났을까? 경찰관이 뭐 빠진게 있다면서 학교로 찾아왔어요. 우리를 함평경찰서로 가자는 거예요.
우리가 경찰서에 들어서자마자 "폭동새끼들! 양말 벗어! 혁띠 풀어!"
소리치더니 바로 구치소로 집어 넣었어요. 벌써 형들은 잡혀와 있었습니다.
형들은 "느그들 막둥이들 학생들까지 잡아 가둘려고 하냐?"
"나가면 가만히 안 둔다."하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했어요.


Q. 구치소는 처음 들어가보셨을 거 아닙니까?
A. 그렇지요. 그래서 나는 엄청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산비둘기 잡어다 가둬두면 퍼덕거리다 죽어버리는 경우처럼 내 몸에서 열이 나고 죽것드라고요. 그러다가 나는 쓰러져 버렸습니다.
눈떠 보니까 함평 재생병원에 링겔 꽂고 내가 누워 있었습니다. 형사가 내 앞에서 지키고 있고요. 나는 정신을 좀 가다듬었습니다. 병실이 2층인데 그냥 뛰어 내렸습니다.
집에 가서 창고에 있는 농약을 먹고 죽어불라고 마음 먹었지요.
집에 도착해서 농약을 따서 막 마실라고 하는데 내가 살려고 그랬는지 후배들 둘이 우리 집에 왔습니다. 농약병을 든 나를 보고 달려들어 농약병을 빼앗아 갔습니다.
잠시후 형사가 나타나서 나에게 하룻밤만 병원서 자면 풀어준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따라갔습니다.


Q. 풀려나셨습니까?
A. 거짓말이었어요. 다음 날 나를 경찰서로 데리고 가더니 구치소에 있는 사람들까지 포승줄로 다 묶었어요. 25여명 정도 트럭을 태워 나주경찰서로 데리고 갔어요.
거기서 나주 사람들을 더 태우고 상무대로 우리를 데리고 갔습니다.


Q. 상무대에서는 며칠이나 수감되어 있었습니까?
A. 30일. 한달간 있었어요. 방학하기 한참 전에 잡혀가서 방학 끝나고 나왔으니까요.


Q. 학생을 3개월 동안 재판 절차도 없이 수감 시킨다는 것은 이해하기 참 힘듭 니다. 그 곳 생활은 어땠습니까?
A. 말로 다 옮기기가 힘듭니다.
우리가 수감된 곳은 공수부대원들이 늘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모든 행동이 감시 받는 생활이었습니다. 잠은 맨바닥에 거적을 덮고 잤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맞아 본적이 없습니다.
저녁에는 10시까지 정신교육을 받았는데 조금만 몸이 틀어지기라도 하면 호대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여름이라 모기에 물리면 움찔할 수도 있는데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대검 착검한 M16 개머리판으로 내리치고 군화발로 짓밟았습니다. 먹는 밥은 늘 꽁보리 밥이었습니다. 일부러 밥에다 돌을 집어넣어 제대로 씹을 수 없게 했습니다.
일광욕을 시킨다고 여름 땡볕에 세워뒀습니다.
자갈밭에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을 시켜 손,발 무릎이 까지고 피가 나게 했습니다.
그나마 우리는 A급, B급에서 B급이였습니다. B급에서 2단계 B2라서 좀 나았습니다.
우리 윗 단계는 전기고문을 당하고 더 혹독하게 당했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바라보는 고산봉은 높고 푸르렀습니다.
우리 함평에서 5.18은 실체 규명 없이 41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화려한 말과 글로 함평 5.18를 왜곡한 사람은 어느새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김행엽씨와 같이 시민군으로 나선 함평에 진정한 5.18의 주인공들은 뒷전입니다.
2022년 제 2회 함평 5.18민중항쟁기념식에는 함평 시민군들이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이들의 이름이 한 분, 한 분이 불려져야 합니다.


함평 5.18를 왜곡한 사람은 군민에게 반드시 사죄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함평에 시민군으로 죽음의 길로 돌진한 함평 시민군들!


당신들의 정신은 이미 민주주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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